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이타이 덴노 (문단 편집) === 가문 === 《일본서기》에 의하면 게이타이 덴노의 아버지는 15대 오진 덴노의 고손자 히코우시 왕(彦主人王)이고, 어머니는 11대 [[스이닌 덴노]]의 7세 손이라 전하는 후리히메(振媛)이다. 하지만 《고사기》나 《일본서기》는 오진 덴노에서 게이타이 덴노 사이의 중간 4대의 계보를 생략했으므로, 《석일본기》(釋日本記)에 인용된 《조구키》(上宮記) 일문으로 가까스로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따른다면 남자의 직계는 호무타와케노오키미(일본어: 凡牟都和希王)라고도 불렸던 '''오진 덴노에서 와카누케후타마타 왕(若野毛二俣王) ─ 오이라츠코(大郎子), 일명 오호호도노오키미(意富富等王)[* 여담으로 오호호도(おほほと)의 "오호"(おほ)는 상대 일본어로 “크다”는 뜻이며, 이는 게이타이 덴노의 본명 오호도(をほと)의 "오"(を, 작다)와 대비를 이룬다.] ─ 오이도 왕(乎非王) ─ 우시 왕(汙斯王), 즉 히코우시 왕 그리고 '오호도노오키미'(乎富等大公王)라 불린 게이타이 덴노로 이어진다고 여긴다'''. 앞서 언급한《조구키》 일문은 마유즈미 히로미치(黛 弘道)가 33대 [[스이코 덴노]] 때의 유고일 가능성을 지적한 이후로는 그 내용의 신빙성이나 실제 혈통에 대해서는 논의가 나뉜다. 《제기》(帝紀) 원사료의 편찬(제29대 [[긴메이 덴노]] 때로 추정) 무렵에는 이와 비슷한 형태의 계보 전승이 성립한 듯하다. 게이타이 덴노의 황후인 [[타시라카 황녀]]는 제21대 [[유랴쿠 덴노]]의 손녀이자 제25대 부레츠 덴노의 남매이다.[* 유랴쿠 덴노는 고분 출토로 실존이 확인된 인물이다.] 이미 야마토로 들어오기 이전에 현지에서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많은 자식을 두었음에도, 즉위한 후 게이타이 덴노는 선대 오오키미인 부레츠 덴노의 여동생을 정식 황후로 맞아들였다. 선대 천황의 누이이며 정당한 혈통인 '직계' 타시라카 황녀를 황후로 삼음으로써 부레츠 덴노계와 융화를 도모함과 동시에, 부족한 혈통적 권위를 일종의 데릴사위 형태로 보강하려는 정략결혼일 것이다.[* [[신라]]에서는 초기에 박씨가 왕이었다가 데릴사위 형식으로 석씨, 김씨가 왕위를 이어받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고려]]의 태조 [[왕건]]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고, 경순왕의 사촌을 왕비로 들여 신라계를 포섭했다.] 또한 타시라카 황녀 사이에서 난 아들인 [[긴메이 덴노]]는 게이타이 덴노의 많은 아들들을 제치고, '적자'(嫡子)로서 대왕위를 이어받았으며, 마찬가지로 타시라카 황녀의 자매 소생인 28대 [[센카 덴노]]의 딸 이시히메 황녀(石姬皇女)를 황후로 삼아, 이시히메로부터 제30대 [[비다츠 덴노]]를 얻었다. 이것은 야마토 왕권의 '방계'라는 혈통적인 결점을 황후의 '직계' 혈통으로 보강하고자 한 것으로, 이렇게 해서 게이타이 덴노와 타시라카 황녀 사이 아들인 긴메이 덴노의 혈통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게이타이 덴노가 즉위함은 우선 야마토 왕권의 성립 근간에서 기인한다. 3세기에 형성된 초기 야마토 왕권은 서일본이 동일본을 지배하기 위한 구조였다. 동일본이 인구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서일본은 둘을 사이에 둔 거대한 산맥과 강 일대를 중심으로 일종의 장벽을 형성시켜 자신들을 통해서만 외부 문물이 유입되도록 했다. 하지만 4세기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문에 주 교류 대상이었던 한반도의 백제, 신라, 가야제국의 힘이 꺾이자 야마토 정권은 곤란해졌다. 그래서 중국 남조를 대상으로 조공무역을 했지만 남조의 진나라도 수나라에 멸망했다. 동일본은 이 혼란 속에서 외부와 직접 교역할 독자적인 루트 확보에 성공해 유랴쿠 덴노 이후에 야마토 왕권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하지만 6세기로 접어들면서 일본에서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호족들이 형성되었고, 다시금 도래인들이 확산되면서 새로운 대왕권을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6세기에는 교통의 발달과 개발의 진행으로 대왕권의 기반이 초기 야마토 대왕권의 중심지였던 마키무쿠가 아닌[* 3세기 마키무쿠에 거대한 전방후원분 고분군이 처음으로 들어선 점과 그 인근에 왕궁이 있었다고 일본서기가 기록한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 기나이 주변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주목할 곳은 오미(近江)였다. 후에 '삼관'(三關)이라고 해서 설치된 호쿠리쿠도(北陸道)의 아라치, 도산도(東山道)의 후와, 도카이도(東海道)의 스즈카 관문은 모두 오미와 가깝다. 즉, 오미가 동국으로부터의 거점이 된 것이다. 오호도 왕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 히코우시 왕의 미오 별장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미오는 오미의 다카시마군이다. 어머니는 에치젠의 미쿠니 출신이며, 친할머니는《상궁기일운》에 따르면 미노의 무게쓰노구니노 미야쓰코의 딸이었다. 처는 8명이었는데, 미오 2명, 사카타, 오사나가 등 비와 호 연안 호족의 딸이 가장 많았고, 그 밖에 요도가와 유역의 만다, 야마토 분지 동북부의 와니, 그리고 오와리노 무라지의 딸이 있었다. 이런 혼인관계를 볼 때 오호도 왕의 세력권이 오미를 중심으로 에치젠, 미노, 오와리에 있었음은 확실해 보인다. 광대한 면적과 많은 인구를 가진 동일본을 장악하는 것이 대왕권의 최대 근거였는데, 오호도 왕은 충분히 그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더욱이 오미의 미오 부근에 가모이나리야마 고분이 있는데, 축조 연대가 6세기 전반이므로 오호도 왕의 일족 출신이었을 것이다. 이 고분에서는 중국 남조 계통의 환두대도, 금제 귀걸이, 금동제 관, 신발, 쌍어패 등 한반도계 장신구가 대량 출현했다. 이를 보아 요도가와에서 세토 내해를 거쳐 한반도까지 인맥을 확보한 것 같다. 오호도 왕이 야마토로 와서 대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야마토에서 대호족으로 군림한 [[소가]]씨와 협동한 덕이었다. 이는 소가씨가 누리던 권세의 원인이 되었다. 야마토 분지에 들어간 오호도 왕은 이와레를 궁도로 삼았는데, 이곳은 미와 산 산록에 가까운 곳으로 하쓰세가와를 이용한 동국(東國) 지배를 염두에 둔 곳이었이다고 생각하면 된다. 자신을 옹립한 세력 중 오오토모 씨족이나 모노노베 씨족은 지명에서 유래된 씨(氏)가 아니라 '도모'나 '베'를 칭하고 있는데, 이는 토지에서 기원한 씨족이 아니라 대왕권 측근에서 편성된 일족임을 보여준다. 5세기의 장도인(杖刀人)이나 전조인(典曺人) 등의 호칭과 원리적으로 상이하며, 오호도 왕 이후 왕권의 권력 기반으로서 일정한 목적 수행을 위해 위에서 만들어낸 씨족(氏族)으로 볼 수 있다. 오호도 왕이 이끌고 온 세력은 오미와 요도가와 구역, 오와리 · 미노 · 에치젠 등지의 호족들이었다. 전체적으로 기나이의 동쪽인데, 엄밀히는 오미를 중심으로 야마시로 · 가와치 북부 · 야마토 분지 동북부, 거기에 오와리 · 미노 · 에치젠이었다. 본거지는 이와레였다. 반면에 소가 씨족은 야마토 분지 서남부의 카츠라기를 본거지로 하여 기이, 가와치 남부(이즈미)를 지배했다. 이와레와 카츠라기의 중간이 아스카로, 후에 이곳이 정권의 소재지가 되었다. 오호도 왕의 진짜 출신지가 어디인지는 모호하나,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오미 다카시마군의 미오로 봐도 좋다고 여겨진다. 미오에서 태어났다는 《일본서기》의 기사와 가모이나리야마 고분의 존재가 주요 근거지만, 이는 혼인관계로도 추측이 가능하다. 일본 호족들의 혼인관계를 보면 처음에는 가까이에 있는 여성과 결혼하고, 힘이 생기면 정략결혼으로 먼 곳의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오호도 왕의 아내 중 네 명이 오미 출신이고, 그중에 두 명이 미오다. 그 밖에는 오와리와 만다, 와니다. 다만 미오의 호족이 유력했다기보다는 미오 출신인 오호도가 시대의 전환기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일약 근린 지역의 지지를 얻고, 마침내 옹립되어 야먀토로 가서 대왕의 자리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우선 오미에서 유력해진 뒤 그것을 근거로 오와리와 만다에 인맥을 확보한 후, 다시 와니를 매개로 야마토와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소가씨와의 협동으로 대왕위까지 올랐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